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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27

안용복의 활약(우리의 독도를 지키다.)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부근에서 어로 행위를 하여 일본에 끌려갔으며, 대마도주는 이 곳을 계속 탐내 왔다. 일본 정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우산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계를 써 준 후 조선으로 돌려보냈으니, 조선 시대에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1963년 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하던 동래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이 일본의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협상하자며, 조선 어부들의 대표로 나선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을 일본 땅 은기도(옥기도)로 납치했다. 이때 안용복은 은기도주에게 "울릉도는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를 잡는데 왜 데리고 왔는가."라고 항의했다. 은기도주가 상관에게 데려가 여기서도 안용복은 조선 땅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들이.. 2023. 11. 2.
고려 서희 - 거란 소손녕과의 담판 고려 6대 성종, 993년 10월 청천강 북쪽 지역인 봉산 인근의 거란군 진영에서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인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가 회담을 벌였다. 이 회담에서 서희는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양국 간의 1차 전쟁을 외교적 담판으로 종식했다. 서희가 거란 진영으로 출발할 때,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며 위로하였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처음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대조의 귀인'을 자칭하며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서희는 '두 나라 대신이 보는 자리'라며 이를 거절했고 소손녕이 세 차례나 서희를 물리치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서로 마주 보며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에서 소손녕이.. 2023. 11. 1.
왕건의 후삼국통일 견훤이 929년 12월 고창에서 고려군 3,000명을 포위하자,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고창(안동)에 이르렀다. 견훤은 고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죽령을 봉쇄한 상태였다. 왕건은 3년 전 대구 공산의 동수 전투에서 견훤에게 참패한 후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고창 전투가 갖는 의미가 컸다. 이들은 견훤이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을 숨지게 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격전 끝에 후백제 군사들은 퇴각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후백제군이 고려군에게 생포되고 8,000여 명의 후백제군이 목숨을 잃었다.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경상도 지역의 30여 개 군현과 명주(강릉)에서 흥례부(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 개의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 고창 전투는 .. 2023. 11. 1.
신라 법흥왕과 불교반포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삼국 중 가장 늦은 527년이었다. 당시 신라는 고대 국가로의 체계를 갖춰 가는 과정에서 불교를 도입하려는 왕과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불교 공인에 있어 귀족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차돈이 순교하였고, 이로써 법흥왕은 불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고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불법이 행해지면 불교가 일어나고 성주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소신의 목을 베어 만민을 굴복하게 하십시오. 527년, 이차돈은 신라의 23대 법흥왕에게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처형된다. 당시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꽃비가 내렸다고 에 쓰여있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 2023.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