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27 1895년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사건)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았다.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가 반발,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도록 일본을 압박했고, 막강한 군사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한다. 1894년 7월,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면서 경복궁을 습격하고 고종을 포로로 삼았다. 그 뒤 반일의 핵심인 왕후 세력을 권력에서 밀어낸 뒤 일본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1년 동안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조종하며, 갑오개혁을 통해 청나라 간섭 배제, 왕권 약화, 근대적 내각제도 확립 등의 개혁안 수백 건을 제정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정치, 경제적 침투를.. 2023. 11. 9. 1885년 거문도 사건(영국의 거문도 점거) 1885년 3월 영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해 있던 동양함대 소속 군함 6척과 상선 2척을 조선으로 출동시켜 조선 정부의 허가나 양해도 받지 않고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섬의 산꼭대기에 영국 국기를 달고, 병영과 포대를 구축했다. 항만 출입구에는 방어 시설을 만들고, 내항에는 목책을 설치했다. 섬의 이름을 해밀턴섬이라고 했다. 영국은 조선 정부에 거문도 점령을 알린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영국은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청나라와 북경 조약을 체결해 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설치했다. 러시아는 1884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함경북도 북동단의 경흥을 조차지(租借地)로 얻은 뒤, 겨울에도 얼지 않은 부동항의 적격지.. 2023. 11. 7.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여러 차례 교섭을 요구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거부로 좌절됐다. 이유는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가 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막부 때와는 달리 '황제' 등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의 상국처럼 행세하려 했다는 것이 거부한 이유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종과 민비(명성 황후) 세력에 의해 일본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일본이 외무대승 모리야마를 앞장세워 1874년 11월에 조선과 국교 수립을 요청한다. 일본은 이번도 '대일본', '황상'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사용한다. 당시에 조선에서는 일본 내부의 정한론(조선에 대한 침략론)을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모리야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리야마는 민씨 세력이 쇄국파를 누르.. 2023. 11. 7. 병인양요-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1863년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에 따라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집정을 한다. 러시아 문제가 부각되자 대원군은 천주교도인 홍봉주와 승지 남종삼으로부터 프랑스 주교로부터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주장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민 씨의 딸과 고종의 유모가 모두 천주교도였다. 대원군은 건의를 받아들였고, 남종삼은 선교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출신의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을 추진하였다. 1865년 겨울이었다. 황해도에 있던 베르뇌 주교가 한양에 도착하기 전, 북경 사신 이홍민이 청나라가 서양인을 죽이고 천주교를 단속하고 있다고 편지를 한양에 보내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를 빌미로 대신들이 대원군이 천주교와 흥정을 하려하고 서양인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 2023. 11. 6.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