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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27

천주교 탄압-기해박해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은 1802년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며 세도를 누리며 그가 죽은 뒤에 아들 김유근이 세도를 물려받았다. 1834년 순조가 타계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순원왕후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으며,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나고, 김유근 자신이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벽파인 조만영이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정책을 문제 삼기 시작한다. 1839년 3월 천주교도에 대한 색출과 체포를 지시하면서 교도들은 무더기로 포도청에 잡혀간다. 기해박해를 맞게 된다. 기해년의 박해는 조선 천주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을 비롯해 조선 신도들의 요청으.. 2023. 11. 5.
지역 차별 철폐를 주장한 반란-홍경래의 난 순조 이후 왕권이 현격히 약화되고, 세도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하면서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피해가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뇌물로 자리를 산 향리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을 수탈했다. 홍경래의 난을 대표로 19세기에 민란이 주도적으로 일어났고 이 같은 시대 상황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나타낸다. 홍경래의 난에서는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서북인 가운데 높은 벼슬은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보듯,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항쟁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주도했다.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1798년 과.. 2023. 11. 5.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순조 1년 1801년,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지하는 교지를 내렸다.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는 오가작통법으로 천주교도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한 집이라도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두 처벌하도록 하였다. 신유년 천주교 박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의 천주교 금지령은 나라의 기강과 유교적 윤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적을 제거한다는 정치적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 사후 순조가 열한 살에 왕위를 잇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정조 시절 위기에 몰렸던 노론 벽파가 실권을 잡았다. 정순왕후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빌미로 정적인 남인과 시파를 숙청하였다. 남인과 시파는 학문이나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순왕.. 2023. 11. 4.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숙종 때 청나라가 백두산 일대를 국경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선 것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양국 백성들이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44년 명나라의 멸망으로 청나라는 수도를 심양에서 연경(북경)으로 옮기고,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출입 금지 지대로 설정하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 지역에도 조선과 청나라 백성의 거주가 금지됐다. 당시 두 차례의 호란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로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까지 올라가 개간 사업을 벌이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람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선의 국경 획정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백두산 주변의 지형과 지리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청나라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여러 차례.. 2023.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