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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역 차별 철폐를 주장한 반란-홍경래의 난

by 도아네의 하루 2023. 11. 5.

홍경래의 난이 발생한 지역

 순조 이후 왕권이 현격히 약화되고, 세도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하면서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피해가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뇌물로 자리를 산 향리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을 수탈했다. 홍경래의 난을 대표로 19세기에 민란이 주도적으로 일어났고 이 같은 시대 상황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나타낸다. 홍경래의 난에서는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서북인 가운데 높은 벼슬은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보듯,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항쟁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주도했다.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1798년 과거에 낙방하자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인 것이라 여기고, 지관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병서와 술서를 익혔으며 정감록에도 능했으며 1800년 그는 가산에서 지관인 태천 출신의 우군칙을 만났다. 10년 동안 서북인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가산의 상인 이희저, 곽산의 진사 김창시, 정주의 거부 이침, 안주 상인 나대곤, 태천의 향임 가문인 김사용, 관산의 평민 홍총각, 개천의 몰락한 양반 이제초 등이 합류했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18일, 다복동에서 김창시가 격문을 공표한 것을 시작으로 1,00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인의 차별에 대한 반감과 세도 정권에 불만, 정감록 사상까지 포함하여 항쟁에 동조할 것을 알린 것이다. 홍경래가 연설을 통해 정진인(鄭眞人)의 지휘를 받아 승리를 기원한 뒤 군사를 출동시킨다. 군사는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귀는 데, 남진군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 홍총각 등으로 이뤄졌고, 북진군은 김사용, 김창시, 이제초 등으로 구성됐다. 남진군은 가산읍으로 들어가 군수를 죽인 뒤 박천읍에 다다랐고, 북진군은 곽산을 충돌없이 점령, 정주에 입성했다. 하지만 남진군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계획은 박천읍에서 영변을 무너뜨린 뒤 평안도 병영이 있는 안주를 함락할 계획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관군 반격이 우려되니 곧바로 안주로 나가자고 주장했다. 서로 말다툼하다가 홍경래의 이마에 부상을 입었고,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북진군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진격 속도를 늦췄다. 봉기군의 자체 내분으로 관군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26일 홍경래는 남진군을 이끌고 안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박천의 송림리에 주둔했다. 북진군은 이틀 먼저 정주에서 선천으로 진격해 선천과 철산을 장악했다. 봉기군이 관군과 처음 싸운 것은 29일 송림 전투에서였다. 봉기군은 대패하였다. 평안도에서 급보에 놀란 조정이 원군을 계속 보냈고 이에 봉기군은 수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홍경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정주성으로 퇴각했고, 관군은 다복동과 박천 등지를 회복했다. 북진군은 용천을 점령한 뒤 의주로 나가려다 관군에게 밀려 곽산으로 후퇴했다. 관군도 곽산에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1월10일 사송야 전투에서 봉기군을 무찔렀다. 북진군도 정주성으로 철수했다. 공방전을 벌이며 승패를 가리지 못하던 중 4월이 되자 관군은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기로 결정했다. 관군은 봉기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성 옆에 모래성을 쌓아 공세를 펼치며 성의 북장대 쪽으로 땅굴을 파 들어갔고, 19일 관군은 땅 밑에 설치한 1,800근의 화약을 떠뜨려 정주성을 무너뜨린 뒤, 성 안으로 둘어가 봉기군을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전사, 홍총각 등은 사로잡혔으며, 우군칙과 이희저는 달아났다가 다음날 체포되었다. 이렇게 홍경래의 난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