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때 청나라가 백두산 일대를 국경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선 것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양국 백성들이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44년 명나라의 멸망으로 청나라는 수도를 심양에서 연경(북경)으로 옮기고,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출입 금지 지대로 설정하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 지역에도 조선과 청나라 백성의 거주가 금지됐다. 당시 두 차례의 호란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로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까지 올라가 개간 사업을 벌이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람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선의 국경 획정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백두산 주변의 지형과 지리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청나라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여러 차례에 걸쳐 관리와 사신을 조선에 보내 백두산 일대의 지리와 형세를 살피고 관련 정보를 조선인에게 입수하기도 했다.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할 당시에도 청나라 조사단은 천리경과 양천척 등 측량 도구를 갖춘 것은 물론, 정밀 지도를 제작하는 기사까지 데리고 갔다. 강희제는 1712년 조선에 국경 조사단 파견을 정식 통보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한성우윤 박권 등을 외국 사신을 받는 벼슬로 삼아 목극등을 맞이하게 했다. 하지만 목극등은 한성우윤을 거부하고 역관과 하급자들만 데리고 갔다. 청나라가 양국의 경계선을 정하면서 처음부터 조선의 뜻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조선 대표가 국경 획정 작업에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정계비에는 조선의 서명이나 국명도 새겨지지 않았다. 백두산 정상에 오른 목극등은 압록강과 토문강의 수원(水源)을 찾아다니다가, 산 정상에서 동남방 4킬로미터 지점인 해발 2,150미터 지점을 분수령으로 여기고 정계비를 세웠다.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들고 변방을 시찰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답사했다. 서는 압록강이 되고 동은 토문강이 된다. 그러므로 이 이수의 분수령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였다. 강희 50년 5월15일
목극등이 정계비를 세운 뒤 하산하자, 박권은 목극등을 만나 정계비를 세우는 과정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기 위해 수원 합류처를 다시 세밀하게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목극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경의 경계를 강으로 삼을 때는 강의 본류가 아니라 발원처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당시 정확한 수원을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목극등이 박권이 지적을 무시함에 따라 논란거리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중엽부터는 국경 주위에 기근이 심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에 조선은 양국 회담을 통해 백두산 일대의 수원을 조사한 결과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으로 밝혀졌고, 청나라가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도 '토문'이라고 명시돼 있으니 공동 조사를 하자고 청나라를 압박하자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목극등이 변경 시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했다. 숙종 때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간도 영유권 분쟁에서 쟁점으로 부각됐다. 결국 조선과 청나라 간의 영유권 회담은 결렬됐으며, 을사늑약 이후 조선의 외교권을 행사하던 일본이 만주 일대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갖는 것을 조건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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