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6대 성종, 993년 10월 청천강 북쪽 지역인 봉산 인근의 거란군 진영에서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인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가 회담을 벌였다. 이 회담에서 서희는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양국 간의 1차 전쟁을 외교적 담판으로 종식했다. 서희가 거란 진영으로 출발할 때,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며 위로하였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처음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대조의 귀인'을 자칭하며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서희는 '두 나라 대신이 보는 자리'라며 이를 거절했고 소손녕이 세 차례나 서희를 물리치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서로 마주 보며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에서 소손녕이 서희에게 제기한 쟁점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침식하고 있다는 것, 둘째는 고려가 거란 대신 송나라에 사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손녕은 옛 고구려가 거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일으킨 발해를 거란이 점령하고 있으니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영역이며, 고려가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것은 거란의 영토를 침범하는 행위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끊고 송나라에 외교 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송나라가 고려와 함께 거란을 공격한다는 얘기였다. 소손녕은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연다면 무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서희는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땅인데, 어찌 침식이라고 하는가." 이어서 "우리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 또 압록강 내외도 우리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길을 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거란에 사신이 오가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국제 정세에 식견이 깊고 외교 역량이 탁월한 서희는 거란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거란의 목적은 송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고려의 요동 지역 진출 및 송나라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여진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해두자는 것이었다. 결국 소손녕의 뜻을 받아들여 거란 성종도 "고려가 화해를 청하니, 군사를 되돌려야 할 것"이라며 대군을 철수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에 따라 고려는 압록강 이동 지역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행정 구역에 포함했다. 고려가 개국 이래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고려는 거란의 약속대로 995년부터 사절을 파견하고, 거란의 연호인 통화(統和)를 쓰는 등 사대 관계를 맺었다. 거란은 고려 침공을 앞둔 991년 압록강 하류 이남의 보주 지역에 내원성을 축조했다. 1차 침공 때 거란이 압록강을 손쉽게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러 가기까지 고려는 화친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었다. 거란은 10월 초 압록강을 건너 군사 요충지인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퇴했다. 그러자 성종은 서경에 머무르며 서희를 전선에 투입했다. 소손녕은 봉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남하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서희가 이를 조정에 보고 하자 성종은 화친을 청했다. 소손녕은 항복을 거듭 요구했다. 이에 서희가 “식량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 ”거란이 큰소리를 치는 것은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땅을 적에게 떼어 적에게 주는 일은 치욕이니, 한번 싸운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하자 성종은 마음을 돌렸다. 서희는 싸우지도 않고, 적장의 담판을 통해 거란의 대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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