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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건의 후삼국통일

by 도아네의 하루 2023. 11. 1.

왕건의 모습을 본따 만든 동상

 견훤이 929년 12월 고창에서 고려군 3,000명을 포위하자,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고창(안동)에 이르렀다. 견훤은 고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죽령을 봉쇄한 상태였다. 왕건은 3년 전 대구 공산의 동수 전투에서 견훤에게 참패한 후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고창 전투가 갖는 의미가 컸다. 이들은 견훤이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을 숨지게 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격전 끝에 후백제 군사들은 퇴각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후백제군이 고려군에게 생포되고 8,000여 명의 후백제군이 목숨을 잃었다. 왕건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경상도 지역의 30여 개 군현과 명주(강릉)에서 흥례부(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 개의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 고창 전투는 3년 전인 927년에 벌어진 공산 전투와 그 양상이 달랐다. 공산 전투의 발단은 925년 조물성(의성)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왕건은 신라의 지원 요청으로 조물성에서 견훤과 싸우던 중 전세가 불리해지자 견훤과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한다. 그러나 견훤이 고려로 보낸 인질이 다음 해에 숨진다. 이에 견훤은 왕건이 살해한 것이라며 군사를 이끌고 옹진(충남 공주)까지 진격한다. 하지만 왕건의 후백제군의 기세가 날카로워 싸움을 피했다가, 927년 군사를 일으킨다. 신라 경애왕도 왕건의 요청에 응해 군사를 보내 후백제 공격에 합세한다. 못마땅하게 여긴 견훤은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으로 향했고, 이에 경애왕은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건은 직접 정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금성 쪽으로 향했고,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시킨 후 대구 공산으로 가서 왕건과 대결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견훤은 승리를 거둔다. 929년까지 견훤은 승승장구하며 왕건을 몰아붙이다가 고창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것이다. 후백제는 고창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932년 왕건의 근거지인 예성강 유역을 공격해 선박 100척을 불 지르고, 대우도(서산)를 공격해 고려군을 물리치는 등 서해상에서 고려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견훤의 장남 신검이 이끄는 군대가 혜산성등에서 다시 고려에 패배하며 후백제는 궁지에 몰린다. 왕건이 934년 9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후백제의 운주(충남 홍성)로 진격했다. 이미 기세를 잃은 후백제를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견훤은 무장한 군사 5,000명을 직접 지휘하며 왕건과 대치했다. 그러나 견훤이 왕건의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세력 차이가 너무 뚜렷했다. 이에 견훤은 왕건에게 화친을 제안했으나, 왕건은 우장군 유금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투를 명령한다. 유금필을 앞세운 고려 기병들은 후백제군 3,000명을 전사시킨다. 견훤의 시련은 왕위를 둘러싼 견훤과 장남 신검과의 갈등이 후백제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935년 견훤은 평소 총애하던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래서 견훤은 금강의 형인 양검과 용검에게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을 맡긴다. 이에 장남 신검은 이찬 능환을 통해 양검, 용검과 접촉해 아버지를 제거하고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을 음모를 꾸미고 정변을 일으킨다. 신검은 그해 3월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전북 김제)에 강제 유폐하고 동생 금강을 죽여 버린다. 견훤은 3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가 점령한 나주로 피신한 뒤 왕건에게 의탁할 뜻을 밝혔다. 왕건은 936년 9월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를 상대로 일리천(경북 선산)과 황산(충남 연산)에서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해 935년 12월 멸망한 상태였다. 전투에서 견훤과 왕건이 나란히 고려군을 이끌었다. 견훤을 앞세운 고려군의 공격에 후백제 군사들은 후퇴를 거듭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하였다. 왕건은 송악(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재력을 모은 무역상의 후손이다. 왕건은 10세기 초 궁예 세력이 반신라 정서를 등에 업고 후고구려를 세우자,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궁예의 포악하고 교만한 성격으로 민심이 동요하자, 918년 궁예와 결별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왕건은 호족의 자손으로 천문과 역술에 뛰어난 책사로 두고, 신라에 대한 친선 정책을 펼쳐 후백제를 고립시킨다. 견훤은 경북 문경 지역의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군 지휘관을 지낸 뒤 농민 세력을 규합해 무진주(광주광역시)를 점령하면서 패권 싸움에 뛰어든다. 두 사람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부터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9년 동안 숙명적인 라이벌로서 공방전을 벌였다. 이들이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곳은 경주 인근을 중심으로 한 경북 지역과 낙동강 유역이었다.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고창 전투와 공산 전투도 둘 다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최후의 승자는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