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16대 근초고왕 시절인 4세기 중엽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시기에 한반도에는 북쪽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 동남쪽으로 신라와 가야가 자리를 잡아 영토를 잡고 있었다.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 전체는 물론 강원도와 황해도 일부까지 차지했다.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승리는 4세기부터 시작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간 쟁탈전에서 백제가 먼저 한반도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패권을 잡았음을 보여준다. 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황해도 예성강)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오는 것을 기다려 갑자기 쳐서 고구려군을 패배시켰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힘껏 싸워 막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니 군사를 이끌고 왔다.
강력한 정복 군주였던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과 내우외환을 차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근초고왕은 왕위를 부자간 계승으로 바꿔 평양성 공격에 참여한 근구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방관을 파견해 지방 조직을 관리하기도 했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또 중국의 동진 왜와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이며 백제를 동북아시아의 국제 상업 국가로 성장시켰다. 백제는 중국과 왜의 중개 무역을 맡아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동시에 근초고왕은 신라, 왜, 동진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는 한편 이들의 외침 가능성도 미리 막았다. 백제의 학자인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파견돼 태자의 스승이 되고 천자문과 논어 등 유학을 전파한 것도 근초고왕 때였으니, 학문적, 문화적인 자긍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일 간에 그 성격을 놓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칠지도도 근초고왕 재위 당시 백제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다. 칠지도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된 길이 74.5cm의 철제 칼로, 칼날 양옆에 모두 여섯 개의 작은 칼날이 가지처럼 뻗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칠지도의 모조품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칠지도란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다. 칼 양면에 새겨진 글자 내용으로 보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백제 왕실에서 제작하여 왜 왕실에 준 것이다. 이 무렵 백제는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두고 고구려와 경쟁하면서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칠지도를 통해 이 시기 백제가 중국 동진 및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제철 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고조선의 철기 문화에 영향을 받은 한강 이남 지역의 마한 연맹체 소속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와 고구려에 이어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 지역에서 건국한 백제는 3세기 중엽인 260년 고이왕 시절 한강 주변 소국들을 통합하여 연맹왕국을 만들었다. 6좌평과 16두품 등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한 세기가 지난 뒤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강력한 고대 국가의 발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근초고왕 때 최고조에 달했던 백제는 평양성 공격 후 20년 만에 꺾이고 말았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396년 백제의 58개 성을 점령하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후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역전된다. 4세기 중엽 백제가 차지했던 패권은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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