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은 1802년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며 세도를 누리며 그가 죽은 뒤에 아들 김유근이 세도를 물려받았다. 1834년 순조가 타계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순원왕후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으며,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나고, 김유근 자신이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벽파인 조만영이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정책을 문제 삼기 시작한다. 1839년 3월 천주교도에 대한 색출과 체포를 지시하면서 교도들은 무더기로 포도청에 잡혀간다. 기해박해를 맞게 된다. 기해년의 박해는 조선 천주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을 비롯해 조선 신도들의 요청으로 조선 교구를 중국의 북경 교구에서 독립시키고, 조선 교구를 지원하기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에 소속된 프랑스 출신 신부 3명을 조선에 파견한다. 헌종 2년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감시를 피해 서양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왔다. 이어 12월에 샤스탕 신부, 이듬해 1월에는 조선 교회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신부가 의주성을 넘어 입국했다. 이들의 전교 활동은 1837년 1,200여 명이 세례를 받았고, 1836년 당시 6,600여 명이던 조선의 천주교도가 1839년에는 9,000여 명으로 늘었다. 프랑스 출신 신부들은 입국하자 수개월 말을 익힌 뒤,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상복 차림으로 전도 활동을 벌였다. 모방 신부는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후 1836년 2월 10대 중반의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등 세 명을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갈 신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1834년 청나라 신부 유방제가 정하상의 도움으로 한양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조선에 천주교가 세를 확장하고 있을 때, 벽파인 조 씨 세력이 안동 김씨 세력의 천주교 유화책을 문체 삼았다. 이 과정에서 박희순을 비롯하여 궁녀 3명이 포함된 교도 수십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였다. 체포된 천주교도들은 천주교를 모욕하고 배교(背敎)를 강요하면 풀려났지만, 응하지 않으면 무조건 처형됐다. 그해 6월 정하상과 그 가족들이 붙잡혔고, 7월에 프랑스 신부 3명이 각각 경기도 수원과 충청도 홍주에서 체포되었다. 정하상, 프랑스 신부 3명은 그해 8월 모두 처형되었다. 기해년 한 해 200여 명의 신도가 순교하였다. 기해년의 박해는 1841년까지 고문과 옥사, 처형이 이어졌다. 모방 신부의 도움으로 마카오에 간 김대건이 1845년 9월,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김대건은 당진을 근거지 삼아 전도 생활을 하며 교도를 확장해 나갔지만 1846년 5월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던 중 교도 19명과 함께 옹진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간다.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그해 9월 김대건을 비롯해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김대건의 나이는 26세였다. 이를 병오박해라 하고, 기해박해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1849년 헌종이 타계하자 철종이 왕위에 오른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는 밀려났다. 천주교에 대해 다시 관대한 정책을 펼쳤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승훈 등의 죄가 사면된 것도 이때이다. 조선 사회는 법망과 기강이 무너지던 시점이고 이를 틈 타 천주교 교세는 더욱 확장되고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후 1만 명 안팎이던 천주교도는 1865년 무렵 2만 명을 훨씬 넘게 된다. 그러나 1866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천주교도들은 다시 한번 희생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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