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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by 도아네의 하루 2023. 11. 7.

고종황제어진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여러 차례 교섭을 요구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거부로 좌절됐다. 이유는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가 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막부 때와는 달리 '황제' 등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의 상국처럼 행세하려 했다는 것이 거부한 이유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종과 민비(명성 황후) 세력에 의해 일본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일본이 외무대승 모리야마를 앞장세워 1874년 11월에 조선과 국교 수립을 요청한다. 일본은 이번도 '대일본', '황상'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사용한다. 당시에 조선에서는 일본 내부의 정한론(조선에 대한 침략론)을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모리야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리야마는 민씨 세력이 쇄국파를 누르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외교적 접근 대신 군사적 압박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일본 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일본 외교 문서에 의하면 모리야마 부관을 시켜 이런 좋은 기회에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일본 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1875년 5월 운요호 등 군함 세 척이 조선에 왔다. 동래 앞바다에 도착해 함포 사격으로 무력시위를 벌이고, 동해안을 따라 영흥만까지 올라갔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또 8월 20일 운요호는 항로를 측량한다는 이유로 조선을 다시 침입했다. 무장한 운요호는 서해안을 올라가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고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군이 방어 차원에서 포 사격을 가하자, 운요호도 함포로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영종도에 상륙해 관청과 민가를 불태우고, 살상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것은 일본이 조약을 맺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한 운요호 사건이다. 1876년 1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왜관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과 전권대신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해 시위를 벌인 뒤 강화도에 상륙해 무력으로 위협하고 조선 정부에 회담을 요구했다. 일본이 제시한 13개 조약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를 인천과 부평으로 상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최익현은 척화 상소를 올렸으며 했으며, 반면 박규수 등 일부 대신들은 일본 군대를 막을 수 없다며 일본 요구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공문을 보내 '조선이 일본과 통상 거부를 하면 이후의 일은 책임질 수 없다.'며 간접적으로 개항을 권고했다. 조선과 일본은 2월 3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12개 조항의 조일수교조규를 체결한다. 이를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라고 한다. 1관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하지만 4관과 5관에서는 부산을 포함에 모두 세 곳을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산을 뺀 나머지 두 곳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에서 정하기로 했으며, 이후 일본은 인천과 원산을 지정한다. 이는 부산과 인천, 원산을 추후 한반도 침략의 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적 계산이 반영된 결과이다. 7관은 일본이 조선의 해안이나 도서를 임의로 측량해 해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으로, 일본 군함의 무력 침공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9관에서 양국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간섭할 수 없고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조선의 산업을 보호할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채 완전한 자유 무역이 이뤄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10관에서는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른 일본인은 일본에서 일본의 법률로 다스리도록 함으로써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정면으로 침해하고 부정하는 굴욕적인 조항이었다. 일본이 주장한 13개 조항 가운데 최혜국 대우 조항을 뺀 12개 조항이 모두 수호조규에 포함됐지만, 조선이 요구한 미곡 교역 불허 등 6개 조항은 반영되지 않았다. 6월에 체결된 수호조규부록과 통상장정에서는 개방된 항구에서 일본 화폐 유통 인정, 관세 주권 포기, 미곡 무제한 수출 허용 등 내용이 담겨 조선의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결과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