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1895년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사건)

by 도아네의 하루 2023. 11. 9.

명성왕후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았다. 만주와 조선 침략을 노리던 러시아가 반발,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도록 일본을 압박했고, 막강한 군사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한다. 1894년 7월,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면서 경복궁을 습격하고 고종을 포로로 삼았다. 그 뒤 반일의 핵심인 왕후 세력을 권력에서 밀어낸 뒤 일본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1년 동안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조종하며, 갑오개혁을 통해 청나라 간섭 배제, 왕권 약화, 근대적 내각제도 확립 등의 개혁안 수백 건을 제정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정치, 경제적 침투를 강화해 나갔다.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고종과 왕후는 삼국 간섭을 상황 반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일본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황후는 갑오개혁 당시 일본을 견제하려다 실각한 민영준의 정계 복귀를 꾀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고종은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 등을 내각의 기용하에 친일파 제거를 시도하였다. 일본은 세력 만회를 위해 생각하였고,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다. 처음에는 친일 개화파 박영효를 사주하여 일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자 주한 일본 공사관이 나선다. '여우 사냥', 이것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한 작전에 붙인 이름이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시해를 주모하고, 과격한 성격의 미우라를 후임으로 천거한 것이다. 거사 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정했다. 거사 날짜를 기다리던 미우라에게 10월 7일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안경수를 공사관으로 보내 훈련대 해산과 무장 해제, 민영준의 궁내부 대신 임명을 통고한 것이다.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왕후의 조치이다. 궁궐 수비를 명분으로 설치된 훈련대는 일본군 장교가 훈련을 맡고 있어 일본 공사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다. 궁궐 수비전담부대로 창설한 것이 시위대로, 미국인 윌리엄 다이 장군이 교관을 맡고 있었다. 훈련대가 빠지면 시해 계획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거사 날짜를 앞당겼다. 그날 밤 아소정에 공사관 직원과 순사, 낭인들이 집결하였고, 이들은 잠든 대원군을 급히 깨워 새벽 3시쯤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향했다. 경복궁은 미우라가 동원한 일본군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새벽 5시쯤 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도착하자 일본 순사들이 사다리로 담을 넘어 들어가 광화문 빗장을 풀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이들을 저지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홍계훈은 총에 맞아 쓰러지자 일본 자객들은 고종의 편전인 건청궁으로 향했다. 이로써 일본군이 궁궐을 장악했다. 건청궁에 이르러 낭인들은 일본군과 함께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낭인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윽박지르며 왕후의 소재를 물었다. 또 고종에게 다가와 어깨와 팔을 잡고 끌고 다녔으며, 고종 옆에서 칼을 휘두르고 권총을 쏘며 왕후의 거처를 말하라고 압박했다. 마침내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왕후를 찾아냈다. 궁내부 내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왕후 앞을 가로막자 흉도들이 권총으로 이경직을 쓰러뜨렸다. 흉도들은 왕후를 쓰러뜨려 짓밟았으며, 칼을 휘둘렀다. 왕후를 살해하고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초상화와 대조하기도 했다. 흉도들은 칼자국 등 증거를 없애기 위해 미우라의 지시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다. 남은 것은 유골 몇 점뿐이었다. 왕후기 시해된 지 두어 시간 뒤, 고종은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겨 대원군과 미우라 등과 대면했다. 고종은 미우라의 강요에 의해 친일 개화파 중심의 김홍집 내각을 조직했다. 일본인 흉도들의 행패는 고종을 호위하던 러시아인 기술자와 시위대 교관 등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됐다.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일본은 미우라 일당을 송환해 재판을 열었지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린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