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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조선에 여러 차례 교섭을 요구해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거부로 좌절됐다. 이유는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가 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막부 때와는 달리 '황제' 등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의 상국처럼 행세하려 했다는 것이 거부한 이유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종과 민비(명성 황후) 세력에 의해 일본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일본이 외무대승 모리야마를 앞장세워 1874년 11월에 조선과 국교 수립을 요청한다. 일본은 이번도 '대일본', '황상'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사용한다. 당시에 조선에서는 일본 내부의 정한론(조선에 대한 침략론)을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모리야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리야마는 민씨 세력이 쇄국파를 누르.. 2023. 11. 7.
병인양요-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1863년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에 따라 그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집정을 한다. 러시아 문제가 부각되자 대원군은 천주교도인 홍봉주와 승지 남종삼으로부터 프랑스 주교로부터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주장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민 씨의 딸과 고종의 유모가 모두 천주교도였다. 대원군은 건의를 받아들였고, 남종삼은 선교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출신의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을 추진하였다. 1865년 겨울이었다. 황해도에 있던 베르뇌 주교가 한양에 도착하기 전, 북경 사신 이홍민이 청나라가 서양인을 죽이고 천주교를 단속하고 있다고 편지를 한양에 보내면서 상황이 바뀐다. 이를 빌미로 대신들이 대원군이 천주교와 흥정을 하려하고 서양인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 2023. 11. 6.
천주교 탄압-기해박해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은 1802년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며 세도를 누리며 그가 죽은 뒤에 아들 김유근이 세도를 물려받았다. 1834년 순조가 타계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순원왕후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으며,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나고, 김유근 자신이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벽파인 조만영이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정책을 문제 삼기 시작한다. 1839년 3월 천주교도에 대한 색출과 체포를 지시하면서 교도들은 무더기로 포도청에 잡혀간다. 기해박해를 맞게 된다. 기해년의 박해는 조선 천주교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을 비롯해 조선 신도들의 요청으.. 2023. 11. 5.
지역 차별 철폐를 주장한 반란-홍경래의 난 순조 이후 왕권이 현격히 약화되고, 세도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하면서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피해가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뇌물로 자리를 산 향리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을 수탈했다. 홍경래의 난을 대표로 19세기에 민란이 주도적으로 일어났고 이 같은 시대 상황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나타낸다. 홍경래의 난에서는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서북인 가운데 높은 벼슬은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보듯,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항쟁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주도했다.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1798년 과.. 2023.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