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40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순조 1년 1801년,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지하는 교지를 내렸다.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는 오가작통법으로 천주교도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한 집이라도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두 처벌하도록 하였다. 신유년 천주교 박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의 천주교 금지령은 나라의 기강과 유교적 윤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적을 제거한다는 정치적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 사후 순조가 열한 살에 왕위를 잇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정조 시절 위기에 몰렸던 노론 벽파가 실권을 잡았다. 정순왕후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빌미로 정적인 남인과 시파를 숙청하였다. 남인과 시파는 학문이나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순왕.. 2023. 11. 4.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숙종 때 청나라가 백두산 일대를 국경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선 것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양국 백성들이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44년 명나라의 멸망으로 청나라는 수도를 심양에서 연경(북경)으로 옮기고,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출입 금지 지대로 설정하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 지역에도 조선과 청나라 백성의 거주가 금지됐다. 당시 두 차례의 호란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로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까지 올라가 개간 사업을 벌이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람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선의 국경 획정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백두산 주변의 지형과 지리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청나라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여러 차례.. 2023. 11. 4. 안용복의 활약(우리의 독도를 지키다.)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부근에서 어로 행위를 하여 일본에 끌려갔으며, 대마도주는 이 곳을 계속 탐내 왔다. 일본 정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와 우산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서계를 써 준 후 조선으로 돌려보냈으니, 조선 시대에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1963년 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하던 동래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이 일본의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협상하자며, 조선 어부들의 대표로 나선 안용복, 박어둔 두 사람을 일본 땅 은기도(옥기도)로 납치했다. 이때 안용복은 은기도주에게 "울릉도는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를 잡는데 왜 데리고 왔는가."라고 항의했다. 은기도주가 상관에게 데려가 여기서도 안용복은 조선 땅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들이.. 2023. 11. 2. 고려 서희 - 거란 소손녕과의 담판 고려 6대 성종, 993년 10월 청천강 북쪽 지역인 봉산 인근의 거란군 진영에서 고려 원정군 총사령관인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가 회담을 벌였다. 이 회담에서 서희는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진 양국 간의 1차 전쟁을 외교적 담판으로 종식했다. 서희가 거란 진영으로 출발할 때, 성종은 강나루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며 위로하였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처음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거란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대조의 귀인'을 자칭하며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서희는 '두 나라 대신이 보는 자리'라며 이를 거절했고 소손녕이 세 차례나 서희를 물리치자 서희는 아예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소손녕은 할 수 없이 서희를 받아들여 동서로 마주 보며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에서 소손녕이.. 2023. 11. 1. 이전 1 2 3 4 5 6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