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후 주로 한반도와 만주, 동아시아 지역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지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며,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을 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성립됐고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에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해 여러 국가로 나누어진다. 기원 초기에, 마한, 변한, 진한, 동예, 옥저, 고구려, 부여 등이 세워져 고조선의 뒤를 이었다. 백제가 마한 지역을 차지하고, 신라가 진한 지역을 차지하고, 변한 지역은 가야 연맹으로 발전하였으며, 고구려는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먼저 마한부터 차례로 보면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 남쪽은 변한에 마주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 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 국가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이 있었다. 삼한시대 마한이, 진한과 변한을 모두 지배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인이 중심이며,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 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 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틀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변한을 보면 변한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이다. 진한과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을 계승하였으며, 소수의 중국 문헌에 의해 진한과 지리적으로 구별되었다. 지금 전라도의 남쪽과 동쪽 및 경상도의 남쪽과 서쪽 지역으로, 남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 동쪽은 진한에 접해 있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12개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구야국을 중심으로 가야로 발전했다고 추측된다. 진한을 보면 기원전 1세기쯤부터 기원후 3세기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로 고대 한반도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을 계승한 부족 국가에서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삼척시, 태백시를 포함한 영동 남부 지역 일부와 경상북도 전 지역으로,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 남쪽은 변한에 접해 있으며, 모두 12개의 국가로 되어 있었다. 사로국이 이들을 병합하여 신라가 되었다. 동예(기원전 82년 ~ 6세기경)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동옥저와 자리 잡았던 초기 부족 국가의 하나이다. 예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동예’라고 부렸다.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강원도 강릉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이르렀고 영서 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했는데, 서쪽의 마한 백제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는 문헌이 있다. 농사를 업으로 하였고, 직조 기술도 발달하였으며 산과 하천을 경계로 급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6세기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신라의 하슬라주로 편입되면서 진흥왕은 옛 동예 영토의 위쪽 지방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움으로써 신라의 영토임을 확실시했다. 고구려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호를 '고구려'라 명명하였으나 5세기 장수왕 대에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후 이름 '고려'는 보덕국과 대조영의 발해에서 국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어 맥을 이었다. 옥저(기원전 3세기 ~ 285년)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헀고,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으며,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여(기원전 4세기 ~ 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광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지고, 494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신분 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4가 등의 지배층, 그 밑의 하호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사 등분한 사출도를 각기 맡아 다스렸다.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 출토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와 영 읍의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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